민주화 초기의 연합적 민주주의 정신과 정치를 돌아보길 호소한다.
그나마 근대화를 위한 갑오개혁과 광무개혁이 지식인들과 백성들의 눈에는 단지 왕실을 위한 작업으로 비추었다.기본 예의조차 갖추지 않은 악질적인 식민지화 과정이었다.
이러한 요인들이 서로 얽혀 있으면서 상호 간에 원인과 결과를 제공했다.19세기 말 조선 정부는 농민들의 봉기를 막기 위해 청나라 군대를 요청해서 청·일전쟁의 원인을 제공했다.자립을 위해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조선 정부뿐만 아니라 개혁파들도 청·일.그러나 과연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정확히 인식을 하면서 논쟁이 진행되었는지 의문이다.
특별한 조약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직접 통치를 하는 제국과 식민지의 관계는 아니었다.여기에는 당시 조선 정부와 개화파 지식인에 대한 평가가 그 핵심에 있었다.
일본의 군국주의화와 청의 몰락은 논란이 되지 않는 역사적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조선 무능론만 대비 일본의 군국주의 읽지 못한 조선 청나라의 속국 정책에 크게 반발 대한제국 뒤늦은 개혁정책 한계 학계와 시민사회 인식차 좁혀야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들었던 구한말1894~95년 청·일 전쟁에 종군했던 프랑스 언론인 조르주 비고가 묘사한 당시 한반도 주변 상황.
김옥균의 생각은 루쉰의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조선 왕의 지위를 자신과 같은 지위.